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토쿠 덴노 (문단 편집) == 태상황 스토쿠 [[텐구]]의 전설 == 1176년 겐슌몬인(建春門院) · 다카마쓰인(高松院) · 로쿠조인(六條院) · 구조인(九條院) 등 고시라카와 법황[* 황위에서 물러나 불교의 승려로 귀의한 자를 '법황'이라고 불렀다.]과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사망하자 사누키인이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원령의 소행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안겐(安元) 3년(1177) '''엔랴쿠지의 강소'''(強訴), '''간겐의 대화재''',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 등 헤이안 시대가 붕괴되고 본격적인 무가 정권과 봉건적인 전국시대에 접어들게 되자 당시의 좌대신(左大臣)이었던 산조 사네후사(三條實房 1147~1225)가 그의 일기인 《우매기》(愚昧記) 안겐 3년(1177) 5월 9일 조에 >"사누키인 및 우지 좌부의 소행이라고도 한다." 고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사누키인의 원령에 대한 기사가 귀족들의 일기에 빈번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누키인의 원령이 여러 재앙들을 불러왔다는 의식이 형성되는 데는 한때 사누키인에 가담하기도 했던 후지와라노 노리나가(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아들)가 깊이 연관된 것 같다.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經房 1142~1200)의 일기인 《길기》(吉記) 주에이(壽永) 3년(1184) 4월 15일조에, 사누키인과 요리나가의 악령을 신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노리나가 본인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지자 고시라카와 법황은 사누키인이 원혼이 되어 벌인 일이라 여겨 그를 죄인으로 규정한 칙령을 철회했고, 8월 3일에는 사누키인에게 '스토쿠인'(崇德院)이라는 원호를 올리면서 아키히토는 추숭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스토쿠 덴노'로 불리는 것이다. 그의 편을 들었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정1위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추증되었다.(《햐쿠렌쇼》) 주에이(壽永) 3년(1184) 4월 15일에는 호겐의 난의 옛 전장이기도 했던 가스가가와라(春日河原)에 훗날의 아와타노미야(栗田宮)라 불리는 사당을 세워 스토쿠 상황의 원혼을 달래려고 했다. 이 사당은 [[오닌의 난]] 이후 쇠퇴하여 덴분(天文) 연간(1532~1555)에 히라노 진쟈(平野社)에 통합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스토쿠 텐구가 [[일본삼대악귀]]의 일각이자 '''우두머리격'''이라는 루머가 퍼진 적이 있었는데 '''잘못된 소문이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